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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의 순간 #4 너가 이 노래를 들려주면 난 행복해, 특정지역에 프로젝션 / 2012
Romantic Moments #4 When you let me listen to this song, I am so happy, Public Projection /2012

 

행복해01

▲ 너가 이 노래를 들려주면 난 행복해_특정지역프로젝션_2012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달리는 버스를 멈춰 세워

 

늦은 저녁 한 버스가 왕복 4차선 도로에 서 있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지는 스펙터클은 기 드보르가 '삶의 한갓된 외양'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값싼 화려함으로 춤을 춘다. 넘치는 광고와 간판, 상품들은 도로의 양옆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으며 이 문물들을 지배하듯 우뚝 선 건물들은 비역사성의 기념비적 자태를 장엄히 뽐낸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스펙터클은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TV 채널처럼 지나가고, 버스는 스펙터클이 점령한 도시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간다. 버스는 곧 어느 대형 백화점 옆을 지나고 승객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마트폰을 보거나 밖의 풍경을 초점 없이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백화점과 그 부지 전체를 화려하게 치장하던 네온과 형광등이 일제히 소등된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갑자기 소멸된 듯 잠잠해진 한 어두운 공간으로 시선을 옮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도시에 대한, 스펙터클에 대한 의식의 전환이자 개인에게 선사된 어떤 순간이다. 장근희의 <너가 이 노래를 들려주면 나는 행복해>는 지난 작업 <일상의 고역>의 연속선상에 있는 작업이다. 이것은 늦은 저녁 고속도로 밑 교각에서 프로젝션 되었다. 대화의 음성은 화려한 텍스트를 입은 채 적막했던 공간을 위트있게 부유하고, 투사 공간의 배경인 시멘트벽은 좀 전의 황량함을 벗어나 영상에 의해 환영적 질감을 드러낸다. 본 작업에서 선택된 어떤 짧은 대화는 이전의 고역을 토로하던 대화와는 사뭇 다르게 수상하면서도 별 내용이 없는, 하지만 "가관이네"라는 말이 나올법한 그런 췌언, 장난말 같다. 일상적 대화의 파편은 도심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장소, 틈으로 존재하는 모호한 장소를 장악하고 화려한 네온 빛 텍스트로 점유한다. 이것은 스펙터클 도시에서 소등된 백화점의 공간이 대중에게 전환의 묘를 선사했듯, 도로를 지나던 버스 안의 개인에게 인식의 전환과 함께 일상의 우연한 낭만을 제공하는 맹랑한 장치이다.



행복해02

▲ 너가 이 노래를 들려주면 난 행복해_특정지역 프로젝션_2012



맹랑한 장치

맹랑한 장치는 즉 공공장소에서 언어를 발화하여 관객으로부터 인식의 전환을 일으키는 작업의 형태를 말한다. 이것은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공적 영역에서 작품을 통해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에 대해 탐구를 해온 제니홀저 Jenny Holzer의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홀저는 타인의 글을 인용하거나 국가 공문서를 차용하는 등 작가의 개입이 배제된 텍스트를 공적 공간에 노출시킴으로써 광범위한 대중에게 노출되고 더 나아가 예기치 못한 내용을 발화함으로써 강력한 관람객의 집중을 이끌어낸다. 초기 작품 <트루이즘>(1978)은 사회체계에 대한 냉소적 클리셰, 275개의 문장을 나열하고 있으며 이들은 서로의 인과관계를 상실한 채 독자의 혼란을 야기한다. 초기에는 공공장소에 포스터, 명판, 티셔츠의 형식으로 배포되었고 후일에는 맨해튼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투사하며 확장된 규모의 공공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업은 언어가 가지는 권력적인 요소를 오히려 모순적으로 나열하면서 언어의 권력을 도리어 빼앗고 해체한다. 마리아노 펜소티는 좀 더 생생한 방법으로 공적 장소에서 공간과 언어의 조합을 통해 관람자를 집중시킨다. 2012년에 서울에서도 진행된 적 있는 그의 작업 <가끔은 널 볼 수 있는 것 같아 Sometimes I think, I can see you>¹는 용산역에 4대의 대형 모니터를 설치하고 4명의 작가가 생산하는 어떤 글들을 실시간으로 노출시킨다. "그는 독일에서 왔다. 사흘 동안 서울을 둘러봤지만, 콘크리트뿐이었다." 저자가 타인을 관찰하며 쓴 글은 관찰과 허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작가의 기억과 상상이 혼합된 글들은 모니터를 통해 투사되고 이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는 관객은 자신에 대한 글일지도 모르는 텍스트를 보며 일종의 쾌감을 느낀다. 작가의 이 같은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는 관찰자와 목격자의 시선을 공존하게 하며 이들의 경계를 재맥락화 하는 시도이다. 이것은 예측할 수 없고 매우 즉흥적이다. 장근희의 <너가 이 노래를 들려주면 나는 행복해>는 제니홀저와 마리아노 펜소티의 작업과는 다른 차원의 작업이지만 공공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텍스트를 발화하고 있다는 것과 텍스트에 모두 작가의 주체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 작업의 대상이 우연한 관람객이라는 점에서 세 작가의 접근방식은 유사한 지점을 가진다. 하지만 장근희의 작업은 분명 다른 방향을 향해 있다.


¹2010년 베를린에서 초연된 작업으로 한국에서는 2012년 <페스티벌 봄>을 통해 용산역에서 진행되었다. 한국 작업에서는 소설가 김연수, 시인 강정, 기자 하어영, 싱어송라이터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가 작가로 참여했다.

 



행복해03

▲ 너가 이 노래를 들려주면 난 행복해_특정지역 프로젝션_2012



'틈'과 '파편'

첫째로 작가가 선택한 장소는 위에서 언급한 두 작가에 비해 고립된 장소이다. 제니홀저의 작업은 주로 공공장소나 스펙터클의 전면에 위치하며 펜소티의 작업 역시 적극적 관람자를 다수 보유한 공적 공간에 위치한다. 그에 비해 장근희는 적극적 관람자가 부재한 스펙터클의 '틈'에 존재한다. 텍스트가 도시의 애매한 공간을 외롭게 장식한다는 점, 다른 두 작가에 비해 적극적인 독자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가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 훔쳐낸 사적 대화를 공공의 스펙터클 전면에 틀어놓는다는 것은 오히려 가볍고 치사스러운 처사이다. 공간의 '틈'에 투사하는 작가의 태도는 익명적 개인의 일상에 대한 조심스러움, 배려의 태도로 여겨진다. 또한, 장근희의 작업은 관람객의 수동적 수용으로는 완벽히 전달될 수 없는 것으로 대중의 적극적 수용의 제스처를 요구하는, 언제나 수동적 수용을 요구하는 스펙터클¹에 반하는 태도이다. 작업이 프로젝션 된 장소는 자동차가 지나가는 도로 사이에 있는 교각이었다. 걸어서는 접근하기가 어려운,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적극적으로 기사에게 내려달라고 요청한 후 불법하차를 한 뒤에야 제대로 감상을 할 수 있는 그런 적극성이 요구되는 곳이다. 둘째, 공간 위를 부유하는 텍스트는 위에서 언급한 홀저와 펜소티의 텍스트의 해체적인 기능을 가졌다고 해석하기 어렵다. 장근희의 텍스트는 스스로 도청한 수많은 대화중에서 선택된 한 '파편'으로 어떤 허구도 더해지지 않은 내뱉어진 말 그대로이다. 이것은 일상의 한 부분을 그대로 떼어온 것과 같다. 홀저의 텍스트처럼 모순적 공황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펜소티의 텍스트처럼 허구적이지도 즉흥적이지도 않은, 익명적 개인의 고립되고 진부해 보이는 췌언의 '파편' 그대로를 화려한 텍스트로 과장해서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 드보르는 고립된 삶의 '파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고립된 일상적 삶의 이런 개별적 경험은 언어도 없고, 개념도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기록된 적이 없는 그 자체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 접근도 없는 채로 남아있다. 그것은 소통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되지 않으며 기억할만하지 않은 것의 허위적인 스펙터클적 기억을 위해 망각된다."² 진부하게 여겨져 잘 기억되지 않는 일상의 '파편'을 도청을 통해 기록하고, 특정 공간에서 실험하는 시각적, 음성적 콜라주는 인간의 본질 혹은 일상에 대한 전형성을 전복하는, 일종의 무위적 움직임이다. 고정되고 일반화되어 있는 것을 해체하는 또 다른 시도이다. 개인의 특질적인 어떤 '파편'을 역사화 하는 맹랑한 장치인 것이다.

 

¹ 스펙터클이 원칙적으로 요구하는 태도는 수동적 수용인데, 실은 스펙터클은 아무런 응답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신의 겉보이기 방식에 의해서, 즉 외양의 독점에 의해서, 이 같은 수동적 수용을 이미 달성하고 있다. 『스펙터클의 사회』, 기 드보르, 이경숙 옮김, 현실문화연구, 1996, #12

² 위의 책, #157

 



낭만을 위하여

익명의 개인은 대화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가 이 노래를 불러주면 나는 행복해." 이것은 작가에 의해 기록되지 않고 소통되지 않았다면 잊혀졌을 일상의 파편이다. 하지만 분명 일상에서 소소하게 존재하는 낭만의 순간이다. 일상의 개별적 순간은 생각만큼 진부하지 않다. 앙리 르페브르가 일상의 비참함과 위대함을 조탁하고자 나누어 설명했던 것처럼 우리의 일상은 순간순간이 일반적이지 않은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루하고 모욕적이며 비참한 순간들과 강렬한 욕구와 쾌락의 순간이 공존하는 것이 일상이다. 비극과 희극의 드라마, 박탈과 억압, 노동과 소비로 점철된 혼합체이다. 그리고 이들은 위대하게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일상의 진부함은 이런 반복으로 느껴지는 환각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이미 일어났었던 장면이기 때문에 진부하고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대화 속 개인은 인간적인 개인이며 어떤 것으로도 위장하지 않는 솔직한 존재이다. 그들은 우리 자체이고 우리는 개인적 삶의 현실을 은폐하는 권력, 의도조차 없는 개인이다. 장근희는 이런 개인의 솔직한 췌언을 기념비적으로 투사했다.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개인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상의 단면은 도시의 틈에서 멋을 가진다. 화려함을 입는다. 비루함 속에서 위대함을 지닌다. 작가는 어쩌면 일찍부터 일상의 위대함을 알아챘는지 모른다. 그녀는 잊혀져도 그만인 순간 속에서 낭만의 순간을 발굴하고, 이것을 다시 누군가를 위한 낭만의 순간으로 만들었다. 파편은 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어떤 낭만을 선사하기 위해서. 당신이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달리는 버스를 멈춰 세워주기를.

[글 / 현소영]



▲ 너가 이 노래를 들려주면 난 행복해, 싱글채널비디오, 4분 46초



강지윤+장근희, 현소영 / 2012